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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이야기

by 꼬미팍 2024. 7. 31.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가르침을 반영하며, 가톨릭 신자들에게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작성된 시점은 오래전이므로 현대 사회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으며, 가톨릭이 거짓된 선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평화의 기도가 갖는 잠재적인 문제점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문구는 개인이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개인의 노력만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세 시기의 십자군 전쟁을 예로 들면, 가톨릭 교회는 평화보다는 폭력과 전쟁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앙을 빙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았으며, 이는 교회의 평화 추구가 겉치레에 불과했음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개인에게 평화의 도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위선을 드러내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라는 문구는 매우 이상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종교 재판(Inquisition)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처형했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진리'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의혹을 품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다루었으며, 이는 교회가 실제로는 미움과 다툼, 분열을 조장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교회의 역사적 행보와 모순되며,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주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683년 에스파냐 마드리드에서의 이단심문

 

 

"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라는 문구는 자기희생과 이타주의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는 피해자에게 부당한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동안, 교회는 부패와 권력 남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교황청의 부패와 사치스러운 생활은 많은 신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이는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피해자들에게 이해와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교회의 과오를 은폐하려는 시도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라는 문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이상주의입니다. 특히,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다는 것은 피해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 판매를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많은 이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부패와 상업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용서를 상업화한 교회의 행태는 평화의 기도의 메시지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결론적으로, 평화의 기도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지만, 그 이면에는 모순과 비판의 요소가 존재합니다. 이상주의적 접근, 개인의 책임 강조,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불균형, 종교적 맥락의 한계 등이 그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 기도의 실천에 있어 현실적인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가톨릭이 단순히 좋은 말로 눈속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